
















후회는 때론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만큼이나 진득한 감정이라고 했다.
청명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밤에 가까워졌는지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의 시체뿐인 전장에는 살아있는 이 하나 없었고 그것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덕에 소리하나 없는 적막까지 들어차 섬뜩했고 한편으로는 을씨년스러웠다. 곧바로 이곳을 벗어 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일임을 잘 알지만 이곳으로 마교놈들이 충원하기 위해 더 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뿐만 아니라 가지 않고 이렇게 죽 둘러보고 있으면 살아있는 사람 하나쯤은 간간이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뒤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원래 자신이 할 일은 아니지만, 오늘 그런 일을 해 줄 이는 없다. 결국 전장에 다시금 소음이 찾아온 것이다. 살기가 느릿하게 퍼지는 것이 살아 돌아온 이가 아군은 아니었다. 이에 딱히 실망이라던가 슬픈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보통 적들은 과하게 끈질긴 면이 있으니 이조차도 예상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잘되었다 싶을 수도 있다. 살아있는 아군은 필시 중상일터이니 후에 전력으로 쓸 수도 없지만 저런 적들은 살려두면 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문제가 생기고 보통 그런 문제들은 직접 일일이 나서가며 해결해야 할 정도로 일이 커지기에 저렇게 움직여서 눈에 띄어주는 것이 좋다며.
그리고 그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며 어설픈 위로로 그렇게 오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뒤편의 움직임은 어느 세 지척까지 와 있었다. 몸이 무겁고 다른 생각은 들고 가기는 귀찮으니 상대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기의 떨림으로 타고 오는 느낌에 고개를 살짝 좌측으로 틀면, 곧바로 단도의 서슬 퍼런 칼날이 비도처럼 재빠르게 좀 전까지 머리가 있던 자리에 날아들었다. 크기가 작지 않아 바람 소리까지 내며 달리던 단도가 목표를 이루지 못 하고 바닥에 꽂히자, 청명은 곧바로 몸을 돌리고 그와 동시에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려,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검을 막아낸다.
막아내기 무섭게 곧바로 까앙-!하는 금속이 맞붙이 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숨소리가 그 뒤를 따라붙는다. 청명은 오랜 전투에 지쳐 쉬이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한 발자국 앞으로 내밀어 힘으로 상대를 밀어낸다. 이에 상대 역시도 밀리지 않기 위해지지 않을 기세로 힘을 끌어낸다. 다만 청명이 노린 것은 이런 식의 무의미한 힘의 소모전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많은 경험을 가진 노련한 검수였으므로.
한번 온 기회는 놓치지 않는 청명이 곧바로 손에 들어간 힘을 자연스레 점진적으로, 그러나 응수하는 상대는 갑작스럽다고 느낄만한 속도로 빼었다. 그러자 상대는 얼굴이 표정에 드러날 정도로 아차 싶어하며 몸을 지탱하려 했지만 이미 그러기엔 너무 늦은 때인지 몸이 청명이 서있는 쪽으로 쏠려 넘어지듯 하였다.
하지만 생각한 그대로 그들은 원래 끈질긴 족속들이기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남자는 쓰러지면서도 한 번의 공격이라도 더 하기 위해 허리춤의 작은 단도 하나를 더 꺼내 들었고, 그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던 청명은 남자가 더이상의 행동을 취하기 전에 자신의 검을 고쳐 잡은 뒤 거의 눕다싶이한 적의 목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성대의 위치에 정확히 찔렸음에도 신음소리 한 번없는 남자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런 필사적인 모습에는 앞뒤 사정을 모른다면 동정이나 연민을 담을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 뒤 인지라 그러한 감정이 일말조차 남아있지 않은 청명은 조금의 짜증을 담아 검을 휘둘러 목을 완전히 베어내었다.
“ ... ”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전투에 별 의도없이 몸과 분리되어 피 웅덩이를 전진하며 찰박 소리를 내는 머리를 무신경한 낯빛으로 따라가기만 하던 시선이 찰나의 순간으로 저편에서 움찔거리던 손가락에 가 닿았다. 이미 한 껏 예민해진 신경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보이게 된 것 이기도 하다. 혹시 몰라 좀 더 자세히 살펴본 바로는, 그 역시 아군은 아니었음으로 방금까지 쓰러트린 자가 머리와 함께 떨어뜨린 단검을 대충 집어 들고 던져 나름 비도의 느낌을 내며 던졌다.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힘이 있게 던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당한 힘으로 알맞게 던지니 곧바로 단검은 부드럽게 날아가며 머리에 정확히 맞추어졌다. 맞추어진 몸은 그에 몇 번 파르르 떨리다 곧 모든 움직임이 멎으며 추욱 하고 늘어졌다. 결과를 보면 나름 잘 던졌는데 역시 이런 건 자신과 안 맞는지 영 느낌이 안 사는 것 같아 청명은 괜스레 혀를 찼다.
“ 끈질긴 새끼들... 이 정도면 없는 게 확실하겠지. ”
어쩐지 부쩍이나 말수가 줄어 어떻게든 말을 늘려보려 아무도 없음에도 머리로만 진행되던 말을 꺼냈다. 왠지 자신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를 끝으로는 물끄러미 주변을 둘러볼 뿐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여전히 의식하지 않으면 말이 줄어드는 것은 아무리 대단해도 고칠 수가 없었다. 사실 고칠 필요가 없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전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건 그의 대사형의 말에 따르면 나름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미친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미친놈이 되는데, 그렇다고 금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청명은 말이 자꾸만 줄어드는 자신의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다짐보다는 이 자리에 없는 이를 탓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는 필시 왜 이리 사람이 못되 처먹었냐고 이런 게 도사라니 이 세상은 필시 잘못되었다며 한탄할 것이고 자신은 그에 반박하여 머리를 몇 번 쥐어박고는 말싸움이나 실컷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것은 아까 상기했다싶이 이 자리에 없으므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상으로 그러겠거니 할 뿐 실행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도그럴게 죽은자를 다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이는 천지신명도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혀를 찼다. 근래 들어서 말수가 줄기만 했나 했더니 대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늘어난 것 같다. 대충 일다경 정도면 올 것 같은데 그 사이 공백이 생겼다고 이리 잡념만 커져서야. 하지만 그 타박과는 별개로 청명은 그 끝으로 입으로나 머리로나 생각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본디 상실이란 이런 것이다. 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있을 때야 귀찮았지만 없고 나면 그 존재가 퍽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청명 역시 상실의 존재를 알았다. 수많은 전쟁을 뛰었으니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할 노릇이긴 했다. 왜 쓸데없이 거기서 나서 가지고 그래? 성질을 담아 중얼거리면 방금까지 한탄 해 하는 당보 위로 뒷목 잡고 그게 할 소리냐며 쓰러지는 모습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음이 흘렀다.
冬至 : 밤이 연중 가장 긴 시기
24절후의 스물두 번째 절기.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당연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