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화인동
梅花忍冬


*
그 후, 침상으로 비척비척 걸어가 쓰러지듯 잠든 청명이 제 코 끝에 닿은 짙은 암향暗香에 눈을 떴다. 분명 침상에 누워 있엇을 터인데, 매화의 하늘하늘한 꽃잎이 지척에서 보인다. 암향이 매화에서 나는 것인지, 앞에 놓인 술잔에 찬 매화주에서 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매화주 향이 좋구만, 꼭 옛날에 당보랑 마시던 것 같은...
"형님. 오셨습니까?"
"...당보냐?"
죽은 이의 말이 산 자에게 어찌 들린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 눈을 몇 번 깜빡거린 청명의 귀로 불퉁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어왔다.
"그럼 형님의 당보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빼도박도 할 수 없다. 결이 좋은 갈색 머리카락을 느슨히 땋아내리고 녹빛 눈을 초승달처럼 휘는 이 사람은 당보다. 당보가 아닐 수 없었다.
청명이 웃고 또 울었다.
눈앞의 당보는 꿈인 것이 분명했다. 산 자가 죽은 이와 만날 수 있는 곳이 꿈 속 말고 더 있겠는가?
그리고 또 그리던 이를 만났으니 응당 기뻐해야 하거늘, 웃음이 나옴과 동시에 발끝에서부터 절망이 차오른다. 정말 꿈이 아니라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사락, 옷감과 옷감이 맞닿는 소리와 함께 품 가득 안긴 청명의 어깨를 당보가 감쌌다. 청명의 손이 형편없이 떨리는 것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당보야."
"네."
"보야."
"네, 형님."
"내 너를 그리 보내고 나서 얼마나..."
목구멍을 가득 메운 울음에 청명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꿈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그들의 만남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게 놔두지 않을 터이다. 그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으니, 짧은 만남 동안 모두 건네야 할 텐데. 막상 저를 다정히 바라보는 눈을 마주하니 머릿속이 깨끗히 비워지고 슬픔으로 화한 그리움만이 남았다.
당보는 그런 청명을 울게 두었다. 백 년 후,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 떨어져 얼마나 외로웠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기에. 무거운 짐을 매고 묵묵히 걸으면서도 그 고통을 훌훌 털어놓을 수 있는 이 하나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당보는, 청명이 깊이 신뢰하며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이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떨림이 잦아들고, 눈가에 남은 물기를 쓱쓱 닦아낸 청명이 앞에 놓인 술잔에 매화주를 넘치도록 부었다. 이어진 것은 주향 가득한 대화였다.
당보야. 누구 후손 아니랄까봐 지금 당가놈들 성격이 지랄맞더구나.
형님이 하실 말씀입니까?
꿈 속에서까지 맞아보고 싶으냐?
..계속하십쇼.
아평이가 아주 훌륭한 장인이 되었어. 나한테 검을 하나 만들어 줬는데 자하신검에 뒤지지 않더구나.
이름을 무어라 지으셨습니까?
암향매화검暗香梅花劍.
흐흐, 멋진 이름이군요. 잘 지으셨소.
술잔을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끝이 검게 물든 당보의 손가락이 점차 투명해져 흰 술잔이 비쳐 보였다. 술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당보의 손을 느릿하게 얽은 청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 돼. 안 된다, 당보야... 아직 안 된다. 너무 짧았어. 청명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막혀 나오지 않았다. 깊이 소용돌이치는 녹빛 눈을 접은 당보가 두 손으로 청명의 손을 쥐었다.
"형님. 일전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겨울이 아무리 길지라도 봄은 온다 했던 말 있잖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매화인동梅花忍冬, 겨울을 버틴 매화에게는 봄이 오는 법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저 말고도 있잖소.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立春을 함께 맞이할 아해들이요. 너무 옛 기억에 얽매이지 마시고, 거대한 사명에 목매지도 마시고, 그저 형님으로 계시면 족합니다."
"형님, 이제 가야 합니다. 잠깐이나마 뵐 수 있어서 좋았소."
다만, 흘러간 이라 할지라도 가끔 기억해 주시면 영광일 거외다.
이리 입모양으로 말한 당보는 곧 빛이 되어 흩어졌다.
大雪 :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시기
태양의 황경은 255도에 도달한 때이다.
이날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난다고 전해진다.





율리

